나의 일상

프랜차이즈 카페 사장의 4년 차 운영 후기  02 : 알바생과의 전쟁 그리고 평화

바닐라빈라떼22ang 2024. 3. 12.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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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 카페 사장의 4년 차 운영 후기  02 : 아르바이트생과의 전쟁 그리고 평화

 

 

카페는 직원과 같이 운영하는 것이다.

 

 

내가 빨리 대출금을 갚고 내 수익을 실현해야겠다! 이게 아니라면 사실 하루 종일 사장 혼자 일하기는 힘들다. 처음엔 패기가 넘쳐서 혼자 12시간 이상 매일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가면 금전적으로는 좋을 수 있으나 결국 내 몸이 상해서 장기적으로 봤을 때 손해가 아닌가 싶다.

 

가장 바쁜 점심 이후에는 두 명이 필요할 수도 있고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마감 알바, 주말에는 남들처럼 쉬기 위해 알바가 또 필요하다. 평일은 5일이기 때문에 웬만큼 나눠도 주휴수당이 발생한다. 주휴수당이 발생하면 4주로 계산했을 때 생각보다 많은 인건비가 더 들어가게 되니 평일 마감 알바를 월, 화, 수 나누고 목, 금 나누고 주말은 오전, 오후로 나눴다. 이렇게 하면 애매한 시간대와 애매한 월급으로 인해 사람이 잘 안 구해져서 공백이 생겼던 적도 많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뽑아 놔도 애석하게 잘 버티는 친구들이 드물다. 핑계도 정말 많다. 

' 원래 아팠는데 더 안 좋아졌네요. ' 

' 학교 일정이랑 안 맞게 되었어요. ' 

' 아는 사장님이 일을 도와 달라고 하셔서요. ' 

핑계라는 것을 다 알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본인 인생을 그렇게 살겠다는데. 어차피 법은 근로자 편이어서 기분이 안 좋아도 줄 건 줘야 한다. 그걸 알고 이용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교육받고 이제 혼자 시켜볼까 하고 뒀더니 하루하고 힘들어서 못하겠다며 연락이 왔다. 교육 5일, 혼자 일한 1일 총 6일 치 시급이 생돈으로 나가는 셈이다. 교육만 20만 원 치 받고 '먹튀'하는 친구들이 참 많았다. 

그중엔 간호사가 되겠다는 친구도 있었고, 연예인이 되겠다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겨우 이 정도 일이 힘들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어서 장문의 카톡을 썼다가 지웠다가 반복한 적도 있다. 

그러다가 깨달은 바가 있는데 그냥 이런 사람 인생에 관여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가도록(스스로에게 안 좋은 방향으로) 두는 것이 나만의 복수 방법이 아니었나 싶었다. 겨우 이런 하찮은 일에 감정 소비하는 것이 아까웠고 내가 구구절절 말한다고 한들 알아먹을 친구들이겠는가.

 

자영업자 최고의 고충은 직원 관리가 아닌가 싶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장님이 바뀐다고 하니 다들 뒤숭숭했는지, 그 사장님과의 관계로 인해 남아있던 친구들도 있어서 그랬는지 내가 우리 지점 사장이 되자마자 한 명 빼고 모든 아르바이트생이 그만뒀다. 그때 생각하면 참 힘들었는데 돌이켜보면 내 사람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최대 6명까지만 관리해 보았지만 저가 커피숍 알아보니 10명은 기본이었다. 주휴수당과 퇴직금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쪼개고 쪼개다 보니 그렇게 많지 않나 싶다. 알바 관리하다가 머리털 다 뽑힌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안정적인 구간이 될 때까지 수십 명의 아르바이트생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러다가 A를 만났다. 



내가 카페를 오픈하고 제일 잘한 일 중 하나가 A를 뽑은 것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알바를 해서 21살이 된 그때 경력이 꽤 있던 친구였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그때 수많은 아르바이트생들이 잘렸고 나는 그때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했다. 주말 마감 알바를 구하는 데에만 50명 넘게 지원했다. 동네 작은 카페 아르바이트생 구하는데 50:1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경쟁률이 생긴 것이다.(요즘 그 자리는 세명 정도 지원한다.)

 

그중 최고의 선택을 하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더해 면접만 다섯 명을 봤다. (요즘엔 가장 맘에 드는 이력을 가진 딱 한 명만 보고 결정한다.) 마지막으로 면접을 본 친구가 A였다. A는 카페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나와 같은 동, 같은 라인에 사는 친구였다. 나는 큰 개를 오래 키우고 있어서 우리 아파트 웬만한 사람들은 우리 개를 안다. 이 친구도 우리 개와 나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더욱 반가웠고 선한 눈빛과 귀여우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말투를 듣게 되자 속으로 '이 사람이다.' 생각했다. 

A는 엄마를 따라 간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고 간호대를 다니는 친구였다. 당장 일하자고 했고 3일이라는 짧은 교육기간을 가졌다. 이렇게 교육기간이 짧아도 스스로 노력만 한다면 일을 마스터한다고 생각했다. 4일 차가 되던 주말 A가 혼자 일하던 날이었다. 주말인데 할 것도 없고 나가서 창고 정리나 해야지 하고 카페에 나왔는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 빵을 굽고 있었다. '사장님..' 하면서 나를 쳐다보는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그 빵을 주문한 손님은 20분을 기다렸고 내가 대신 사과하고 잘 넘겼고 아르바이트생은 나에게 죄송하다 하였고 나는 내가 부족해서 일어난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그날은 A의 역대 최고 힘든 날로 기억되었고 3년이 지난 지금 웃으며 그때 그랬었지 하며 추억하는 날이 되었다. 

A는 그날 이후로 모든 레시피를 외웠고 카페에서 최선을 다했다. 항상 나에게 물음표를 달았고 이런 것까지 물어본다고? 싶은 질문에 나도 항상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나도 힘들었던 기간이었지만 A에게도 정말 힘들었던 기간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 시작한 새내기 사장과 알바 경험은 있지만 새로 시작하는 단계에 놓인 둘의 합이었으니 말이다.

 

A와 합이 맞아가면서 카페는 안정적으로 흘러갔다. 다들 각각 다른 시간 혼자 일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생들끼리 만날 일이 없었다. 나는 한 직장에서 8년간 근무했고 무리 생활이라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아르바이트생들이 어차피 한동네 사람들이고 나이도 비슷하니 서로 얼굴을 알고 인사하고 지낸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자리에 모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그랬더니 아르바이트생들끼리 또 다 같이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그날을 계기로 더욱더 친해졌고 그렇게 서로서로 잘 지내니 능률도 상승했고 다른 카페에서는 인수인계하면서 기싸움도 한다던데 우리 카페에는 아르바이트생들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B도 우리 아파트에 사는 친구인데 그 친구가 와서 나에게 말했다. 혼자 만의 세상에 갇혀 사는 은둔 생활을 하는 나에게 이런 좋은 관계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어쩌면 부담스럽고 힘들어서 싫었을 자리인데 서로 좋게 좋게 잘 지내게 되는 계기가 되어서 나 또한 너무 기뻤다. 지켜보니 A가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고 현재 우리 아르바이트생들은 서로 일하는 날에도 카페에 와서 앉아서 공부도 하면서 바쁠 때 서로 도와주기도 하고 서로 같은 책을 읽고 대화도 나누고 취업 정보도 공유하고 서로서로 윈윈 하는 관계가 되었다.

 

 

 

 

 

내가 1만 줘도 아르바이트생은 10으로 갚는다. 

 


몇 년간 우리 아르바이트생들을 지켜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왜 이 친구들처럼 열심히 살지 않았을까? 싶을 때도 있고 다들 나보다 10살 정도 어리지만 그 젊음과 열정이 부럽기도 하다. 우리 아르바이트생들은 공부도 열심히 잘하고 일도 열심히 잘하려고 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모습들을 보면 대견하기도 하면서 뿌듯하다. 이렇게 잘 뽑은 아르바이트생은 열 매니저 부럽지 않다. 

노동법이 노동자의 편에 서도 아르바이트생들의 처우가 좋은 곳은 사실 많지 않다. 들어보니 돈이라도 잘 주면 다행이다. 아직도 구시대에 사는 사장님들이 많다. 나는 자영업을 시작하며 내가 당했을 때 싫은 것을 아르바이트생들에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아직도 이 어리고 착한 친구들에게 온갖 욕설과 무례한 말투로 대하는 못된 사장님도 존재하고 본인 딸 같은 친구들에게 성희롱, 성추행을 하는 기가 막힌 사람도 있다고 한다. 

어린 친구들이 부모님께 용돈 안 받고 경제적 자립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는데 도와주진 못할망정 힘들게 한다니 이해가 안 됐다. 나도 19살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기에 누구보다 그 친구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성적인 대상으로 만들고 나를 '야'라고 칭하고 인격모독도 당해 보았다. 30대가 된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내가 당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르바이트생들을 존중하기로 결심했다. 

부부싸움을 할 땐 꼭 존댓말을 쓰기로 했다는 부부들이 생각났다. 반말을 하다 보면 말을 막 하게 될 수도 있고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데 이왕이면 조금 더 순화해서 말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생각해 낸 방법이다. 그리고 적어도 '야'보다는 'ㅇㅇ씨'가 더 나은 것 같다.

 

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화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나는 원래 화가 많은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실수를 해도 뭐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얼른 수습이나 하고 다시 실수하지 않도록 가르쳐주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러나저러나 먹히는 건 먹히고 안 먹히는 것은 안 먹힌다. 일어날 일은 또 일어난다. 

아르바이트생들은 실수를 하고 금액적인 부분을 스스로 메꾸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건 불법이다. 한 세 번째 같은 실수를 하니까 나도 사실 메꾸라고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아르바이트생 머릿속에 상기시킬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또 참았고 이런 실수를 했을 때 내가 얼마의 손실이 생기는지 천천히 설명해 주는 방법을 선택했다. 먹혔던 것 같다.(ㅋㅋㅋ) 

내가 조금만 잘해주면 나는 따르고 싶은 멋진 사장이 된다는 걸 처음 깨달은 때는 내가 자영업을 하며 처음 맞은 명절을 챙겼을 때이다. 아르바이트생들에게도 떡값을 챙겨준다는 글을 봤고 나는 아르바이트생을 공략하기보단 좋은 곳에서 좋은 대우받으며 일 잘하고 있다는 의미로 가족들에게 줄 과일과 커피 상품권을 준비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어서 배달도 직접 했다. 그랬더니 정말 열심히 일하겠다면서 눈을 반짝이며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매출이 계속 오르기만 했다.

 

가끔 어떤 사장님은 아르바이트생이 앉아서 핸드폰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나는 아르바이트생과 같이 볼 책을 가져다 놓았고 핸드폰 대신 노트북을 두들기면 어떻겠냐고 권하기도 했다. 이왕 다른 것을 할거면 '용돈 벌이도 직접 하며 학교 과제도 열심히 해내는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반반이긴 했다.

 

핸드폰을 만진다고 뭐라하거나 앉아 있는 게 꼴 보기 싫거나 한 적은 없다. 바쁜데 그러고 있으면 화를 내는 게 맞지만 손님도 없고 할 일도 다 했고 시급 받는 아르바이트생이 생각해 낼 수 없는 일들을 시키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뒀다. 쉬는 시간도 있어야지 어떻게 일만 하겠니 하는 마음으로.

 

 

 

 

 

마무리

 

 

내가 없는 시간에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내 가게를 전적으로 맡기게 된다. 본인만의 스타일로 손님과 소통하다 보면 본인만 아는 단골손님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항상 좋은 손님만 있지 않다. 내가 아르바이트생들에게 가르친 건 '당신의 무조건적인 친절에 손님이 무례함으로 답한다면 당신도 무례해도 된다.'이다. 서비스직이 '을'인 시대는 지나갔다.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고 친구이고 내 소중한 직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30, 40대의 무례함을 견디기엔 어리고 여린 친구들이다. 심성이 착하고 예의 바르게 살아와서 무례함에 당하기만 하고 혹 사장님께 피해를 주지 않을까 싶어 뒤돌아 눈물 흘리는 친구들이다.

 

당연히 내가 부족했던 부분도 있다. 리더십도 부족했고 마냥 잘해주는 방법이 좋은 방법인냥 쓴소리도 못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가 그런 사람이어서 그랬던 거다.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고 자영업자로서 그 부분은 마이너스이지만 탈 없이 4년간 지내왔던 것 보면 마냥 부족했던 것이 나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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